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탕산 사건 (문단 편집) === [[장호합작]]의 성립 === 원래 장제스와 후한민은 쑨원 사후, 국민당의 계파 분쟁에서 적대적인 입장에 있었다. [[랴오중카이 암살 사건]] 이후 왕징웨이와 보로딘의 연합은 후한민의 사촌동생 후이성이 배후라고 주장하고 후한민을 강제로 소련으로 외유를 보냈으며 [[쉬충즈]], [[린썬]], 쩌우루 등의 국민당 우파들을 대거 숙청했다. 이때 장제스는 왕징웨이와 합작하며 왕징웨이에게 필요했던 군사력을 제공하였다. 허나 1926년 3월, 북벌 문제를 놓고 장제스와 공산당이 충돌하다가 [[중산함 사건]]이 터지게 되어 충격을 받은 왕징웨이는 외유를 떠나고 공산당의 기세도 수그러들면서 후한민은 중국으로 귀국할 수 있었고 그해 7월, [[국민당의 1차 북벌]]이 선포된 이후 장제스가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 좌파들과 사이가 틀어지게 되면서 옛날의 적이었던 후한민과 장제스는 다시 손을 잡게 된다. 장제스는 [[4.12 상하이 쿠데타]]를 일으켜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들에 대한 역습을 감행하고 난징에 정부를 수립하였는데 후한민은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. 이를 [[장제스|장]][[후한민|호]]합작이라 한다. 1928년 2차 북벌로 베이징을 점령하고 [[동북역치]]로 만주를 복속시킨 후부터 1947년 헌법 제정까지 훈정 기간이라 불리는 새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. 하지만 국민당은 너무도 불안정한 정당이었고 국민당 내부의 [[펑위샹]], [[옌시산]], [[리쭝런]]를 비롯한 군벌들과 [[왕징웨이]]같은 장제스 반대파들이 연달아 들고일어나면서 중국 천하는 [[반장전쟁]]이라 불리는 초거대규모의 내전에 휩싸이게 되었다. 이 시기까지 장제스와 후한민은 난징 국민정부를 같이 영도하며 밀월관계에 있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